겨울이 되면 강원도로, 그리고 동해로 떠나고 싶었다. 스무 살 무렵, 방황하던 그 시절 가슴이 답답하면 청량리역으로 달려가 지금은 없어진 통일호 열차를 타고 강릉으로 무작정 떠났던 기억이 있다. 낡은 소설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겨울 바닷바람에 눈시울을 적시고 가슴을 달랬던 적이 있었나 보다.

사진을 찍어 무엇인가를 표현하려 했던 것도 그 무렵부터인 듯하다. 특별한 날 찍는 가족사진, 단순한 여행 기념사진을 벗어나 창작 욕구를 채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처음 혼자 강릉 가는 기차를 타고 동해 바닷가로 갔을 때 근처 가게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사서 찍었던 사진들이 서랍 어디인가에서 필름 꾸러미와 같이 나올지 모르겠다. 사람 없는 바닷가에서 혼자서 뭘 그렇게 찍고 싶었는지 새삼스레 궁금하다.

밤기차는 해 뜰 무렵 종착역에 도착하였다. 운 좋게 좌석표를 얻으면 옆 사람과 서로 말동무가 되었고, 입석표를 들고 타면 낯선 이들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마치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술 한잔 나누기도 했다. 예전 통일호 기차는 긴 여행을 가면서 계속 앉아 있기에 자리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한두 시간만 앉아도 스프링이 느껴질 만큼 엉덩이에 꽤 부담을 주곤 했다. 좌석표를 받아도 불편한 자리에 이리저리 뒤척이며 선잠으로 밤새도록 가는 게 어쩌면 고생스럽기도 했다. (홍상수 감독 영화, 「강원도의 힘」에도 힘들게 밤기차 타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도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끌렸고, 가슴 설레이는 기차여행으로 지금도 추억 속에 남는다. 통일호가 없어지면서 그 몫까지 무궁화호 열차가 떠맡았지만, 왁자지껄하면서도 정다운 분위기는 옛 추억일 뿐인 게 조금 아쉽기도 하다. 서로 어디까지 가냐는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 통일호 기차를 타면서 많은 역을 알게 모르게 지나쳤다. 먼 길을 가면서 멈추는 역이 많으면, 때로는 짜증을 내기도 한다. 타고 내리는 사람 별로 없는 시골역, 통리역처럼 조그만 역에 또 정차하여, 1분 남짓 머무는 시간조차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중앙선 철길 따라 달리다가 제천역에서 태백선으로 거쳐 가도, 영주역까지 한참 내려와 영동선으로 갈아타도 태백이면 왠지 강원도 한복판처럼 느껴졌고, 이제 꽤 왔으니 조금 더 참으면 동해로 갈 수 있다는, 그런 끝이 보였다. 통리역, 심포리역, 흥전역, 나한정역, 도계역을 차례로 지나는 산줄기 따라 이어지는 철길이다. 스위치백으로 연결한 산악철도이기에 기차가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Z 모양으로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길이다. 강릉 가는 밤기차 승객 대부분 잠이 들 무렵 심포리역, 나한정역을 지나치는데, 바로 그때 잠이 깨면 기차가 뒤로 간다는 걸 깨닫고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그것도 몇 차례 경험하면 그런 놀라움보다 '이제 동해가 다 왔구나!'라고 여기면서 다시 안심하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강릉 가는 기차 타면서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강원도 태백 조그만 시골역, 통리역을 일부러 찾아간 게 2006년 2월 겨울날이다. 벌써 3년이나 되었나 보다. 눈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2월 여행을 그렇게 떠났던 건 류장하 감독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을 보고 나서였다. 영화 촬영지 도계에 가는 길목에서 도계역보다 통리역에 관심이 갔고, 시골역 여행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아쉽게도, 2009년 말쯤 솔안터널이 뚫리고, 동백산역이 열리면 통리역과 함께 스위치백 산악철도는 옛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이번 겨울을 끝으로 다시는 눈 내린 영동선 통리역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강릉 가는 기차 시간표를 보면서 1월에 갈까, 2월에 갈까 행복한 망설임이다. 예전 그때처럼 통일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궁화호 열차 일부만 통리역에 멈추는데, 그나마 시간표도 바뀌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좀 해봐야 할 듯하다. 태백 눈꽃 축제가 끝나고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올해 가을에 다시 강릉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다면, 강원도 통리역,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차여행이 될 듯싶다.


사진 - 2006.02, 글 - 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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