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뒤로하고.

책 한 권과 카메라로 채비하고, 오랜만에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떠난다. 2월 마지막 일요일, 고 이은주 씨가 영원한 20대로 남게 된 지 4년이 지난 날에, 겨울의 잔상을 뒤로하고 춘천 실레마을, 김유정역으로 간다.

경춘선은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만으로, 함께한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들뜬 청춘이 가득한 열차이다. 이들도 훗날 젊은 날에 함께 탔던 춘천 가는 기차를 추억할까. 아쉽게도 그때쯤이면 경춘선 무궁화호는 추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경춘선 곳곳이 공사 중으로 메마른 흙먼지만 날리고 있다. 경춘선 통일호가 옛이야기로 남은 것처럼 춘천 가는 무궁화호 열차도 없어질 거라는 현실이 아직은 어색하다. 다소 늦은 느낌도 들지만, 그래도 광역전철이 다니기 전에 옛 철길을 달리는 춘천 가는 기차를 타본다.

차창 밖을 보니, 아직 무궁화호 열차는 전철이 다니는 곳과 겹쳐 달린다. 지하철역 플랫폼에서 서성거리는 사람과 시선이 교차한다. 나 또한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빠르게 지나쳐 가는 무궁화호 열차에 가슴이 살짝 들떴던 기억이 있고,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인 것은 말할 나위 없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춘천에는 겨울의 잔상이 남아 있을까.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랑대역은 특이한 비대칭 건축 그대로 남아 있고, 금곡역도 아직은 옛 시골역 모습으로 반기나 다른 역은 대부분 공사 중으로, 멋과 깊이는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식이라는 이름으로, 공허함이 가득한 유리궁전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터널을 지나 보이는 북한강, 대성리역이다. 역시 새로 공사 중이다. 마주 오는 청량리행 열차에 맞추어 3분간 더 정차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복선 전철화 공사가 끝나고 무궁화호 열차도 더는 다니지 않으면 이런 짧은 기다림도 지나간 이야기가 되고 만다.

청량리역을 떠난 기차는 성북, 금곡, 마석, 대성리, 청평, 가평역을 차례로 지나 춘천으로 계속 달린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낡은 단선 철길을 달리는 완행열차이다. 북한강 따라 경강역, 백양리역, 강촌역을 강바람처럼 스쳐 가면 곧 김유정역이다.






김유정역 바람개비.

낡은 계단을 더듬어 차창 밖 풍경 속으로 걸어간다. 강물에 젖은 모래톱처럼 철로 사이로 흐르는 김유정역 플랫폼에 발을 디딘다. 플랫폼 가운데는 넉넉하고 양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면서 부드러운 선이 흐른다. 내리는 사람 몇 명 없는 것이, 이 조그만 시골역에 모처럼 기차가 머물러도 사람 발걸음 소리는 그리 크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도 김유정역에 무엇이 있느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망설이지 않고 답을 해줄 수 있을 듯하다. 춘천 김유정역에 내리면 바람개비가 예쁘게 반긴다고, 바람 부는 날이면 춘천 가는 기차를 타라고 넌지시 속삭이는 듯 말을 건넨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조그만 시골역.

김유정 선생 (1908.1.11 ~ 1937.3.29) 고향역, 김유정역 예전 이름은 신남역이었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춘천 신동면 증리이지만, 1939년 경춘선 개통 초기에는 신남면이었다. 역 앞 실레마을은 김유정 선생 고향이면서 「봄·봄」, 「동백꽃」 등 주요 작품 무대이기도 하다. 김유정 선생을 기리려는 여러 문인과 지역 주민 바람에 따라, 2004년 12월 1일부터 역 이름을 김유정역으로 바꾸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딴 기차역이 되는 셈이다. 우산 대신 전나무 밑에 서 있는 듯한 조그만 시골역이 아담하다.


역전 막국숫집.

역전 막국숫집, 면수 채운 작은 주전자가 예쁘다. 아저씨는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고, 할머니와 아주머니께서 바쁘게 상을 차리신다. 여자 아이 셋이 같이 있는데, 큰애는 맏언니라서, 막내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몰라도 둘째한테 잔심부름을 주로 시킨다. 이 꼬마 아가씨, 국숫집 딸로 태어난 게 꽤 불만인 모양이다.

오래전에 춘천 명동 닭갈비 골목길에서 닭갈비를 처음 먹었던 추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춘천 막국수를 춘천에 직접 와서 처음으로 맛을 볼 수 있었다. 춘천식 냉면이라고 할까, 육수를 따로 주는 게 취향 따라 비빔냉면이 될 수도 있고, 물냉면이 될 수도 있겠다. 구수한 면수를 주전자에 담아 따로 주는 게 특이하다. 김유정 소설 「산골 나그네」에 "국수를 누른다"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막국수에서 '막'은 금방, 바로 눌렀다는 뜻이다. 향긋한 나물이 좋고 국수 맛도 꽤 당기는데, 막국수라는 이름 그대로 은근히 양이 많다.




김유정문학촌 동백꽃.

역전에서 시골길 따라 조금 걸어가면 김유정 선생 생가와 기념전시관이 있는 김유정문학촌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동백꽃」을 비롯한 김유정 선생 작품을 읽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못다 이룬 사랑이 주는 아픔과 병마가 주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과 해학을 잃지 않았던 글이 무척 아름다웠던 기억은 뚜렷하다. 김유정문학촌에 와서야 김유정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붉은 동백꽃이 아니라는 사실도 새삼스레 알았다. 강원도 사람들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이나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어쩌면 학생 때 국어 시간에 살짝 배웠을 법한데, 까맣게 잊은 듯싶다.

계절은 한곳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생강나무 꽃눈이 말해주듯 '겨울의 잔상'을 느끼기에는 늦게 왔고, '노란 동백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동백꽃 필 무렵 실레마을, 김유정역으로 다시 와야 하나 보다.


봄이 오는 실레마을.

김유정문학촌을 나와 거닐어 보는 실레마을은 김유정 문학 속 세상이다. (기념전시관 입구에서 나누어 주는 안내 소책자를 펼치면 실레마을 그림지도가 된다.) 「동백꽃」에 나오는 산자락이 바로 실레마을을 감싸는 금병산이며, 동백꽃길, 봄·봄길, 산골나그네길 등 김유정 소설 제목을 딴 등산로가 이어진다. 산에 묻힌 마을 모양이 마치 떡시루 같다 하여 '실레'라 부른다. 마을 골목길을 걷다가 낡은 정미소 가까운 곳에 「봄·봄」에 나오는 실존인물 김봉필 영감 집을 찾아볼 수 있다. 조금 더 걸으면 마을회관이 나오고, 김유정 선생이 세운 간이학교 금병의숙 터이다. 날이 풀려서 땅이 거의 다 녹았지만, 아직 그늘진 곳은 얼음이 조금 남아 있기도 하다. 골목길 곳곳에 쌓인 비료를 보니 역시 봄이 오는 길목인 모양이다. 산 하나 두고 춘천 시내와는 많이 다른 시골 마을 모습이다.




해지는 김유정역.

경춘선이 광역전철로 새로 바뀌어도 김유정역, 강촌역, 백양리역, 경강역을 지나는 구선은 관광철도로 남긴다고 한다. 현대화 물결에도 살아남은 낡은 철길 따라 정선처럼 철도자전거가 달릴 수도 있고, 꼬마기차가 달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김유정역은 신선과 구선이 만나는 곳으로 새 플랫폼은 이미 완성되었고, 구 역사 옆은 공사 중으로 현대식 역을 새로 짓는 듯하다. 경춘선에서 가장 서정적인 역으로 경강역과 김유정역을 손꼽지만, 다감한 시골역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유정역에서 서울로 돌아가는 길, 사릉역에서 한 남자가 탄다. 사릉역은 무배치간이역으로 표도 팔지 않는 곳이다. 기차가 하루에 몇 번 서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일단 승차하면 객차 내에서 승무원이 표를 발급해주는 식이다. 해가 지면서 바깥 공기가 꽤 찬 모양인지 금방 탄 남자는 안경 가득 김이 서리는 바람에 잠깐 머무적거린다. 등산복을 차려입은 다른 여행객들과 이런저런 얘기가 곧 오고 가는데, 이 남자 내년이면 사릉역이 경춘선에서 가장 큰 역이 된다고 큰소리친다.


사진 - 2009.02, 글 - 2009.02.


Copyright © As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