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는 길.

강원도 태백으로 모처럼 기차여행을 떠난다. 서울에 봄이 와도 태백은 눈이 내린 겨울나라이어야 하는데, 오랜 가뭄과 계절에서 미리 벗어난 듯한 날씨에 초라한 2월만 그 자리에 있었다. 들어보니 태백 눈꽃 축제도 얼음조각 몇 개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그래도 솔안터널이 뚫리고 도계역에서 동백산역으로 새 철길이 이어지면서, 스위치백 산악철도와 함께 통리역이 없어지기 전에 꼭 다시 가고 싶었다. 예전엔 강릉 가는 기차 타면서 그냥 지나쳤던 조그만 시골역이었지만,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을 보고 나서는 도계와 함께 겨울이면 생각나는 곳이 되고 말았다.




태백 통리역.

먼 길을 가면서 기다림도 짧지 않기 마련인데, 다시 찾을 때는 익숙함이 그 빈자리를 채우나 보다. 창문 밖 풍경에 젖어드나 싶더니 곧 통리역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조금은 부산스러운 태백역을 벗어나 이내 도착한 통리역, 내리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태백으로 관광하러 오는 사람 대부분 태백역에서 내리고, 경상도 쪽에서 영주를 거쳐 올라오는 사람이 영동선 통리역에 내려 태백을 찾으므로, 청량리역을 출발한 기차가 통리역에 머물 때는 타고 내리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다.

통리역 플랫폼은 유난히 폭이 좁다. 어느 조그만 시골역이라도 플랫폼에 가로등과 벤치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인데, 통리역은 가로등조차 세울 자리가 없어 전철주에 조명등을 매달아 놓았다. 한쪽 구석에 행선지를 알리는 역명판과 낡은 신호등이 서 있을 뿐이다. 사진 몇 장 찍으며 역사 쪽으로 가보니, 예전에 없던 울타리가 철길과 역사 사이를 나누고 있어 모습이 좀 달라졌다. 그래도 낡은 벽돌집 역사는 여전하다.

통리역 역사 안에는 옛 인클라인 철도(inclined railway) 모습이 흑백사진으로 안내문과 함께 걸려 있다. 지금은 그 흔적만 일부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통리역과 심포리역 사이를 인클라인으로 운행하였다. 해발 680m 하늘마을 통리에서 심포리까지 거리는 1km 남짓에 지나지 않아도 높낮이 차이는 250m 정도 된다. 단선 철길 영동선이지만, 인클라인은 복선처럼 선로 2개로 만들어야 했다. 통리역을 중심으로 통리역에 있는 화차와 심포리역에 있는 화차를 쇠줄로 연결하고, 통리역에 설치한 전기 모터를 작동하여 화차를 내리면 그 힘으로 심포리역에 있는 화차가 올라오는 식이다. 객차는 이 방식으로 끌어올리기가 어려웠고, 사람은 두 역 사이 가파른 비탈길 따라 힘겹게 걸어가서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 짐꾼도 많았고, 승객 짐은 물론이고 사람도 지게에 태우고 오고 갔다. 통리역을 중심으로 한때 사람 꽤 붐비던 시절로 전해진다.

1963년 영동선 완전 개통으로 통리는 그냥 지나가는 길목이 되고 말았다. 아찔한 높낮이 차이를 이어주는 우회 노선으로, 통리 서북쪽으로 틀어 8km 가까이 멀리 돌아서 내려가는 철길을 새로 만들면서 인클라인 철도 운행을 중단하였다. 통리에 살던 사람 대부분 황지로 이주하는 등 썰물처럼 빠르게 빠져나갔다. 지붕을 아스팔트 싱글로 바꾼 탓에 시골역 다운 느낌은 덜 하지만, 지금 있는 통리역 역사도 그때 새로 다시 지은 건물이다. 빛바랜 통리역사는 역설적으로 1960년대 초 이후 급격히 몰락한 옛 통리를 나타내는 셈이다.

통리역은 오래전부터 무연탄을 취급해온 화물역이다. 가까운 곳에 경동탄광이 있고, 번성했던 지난 역사를 말해준다. 1980년대 후반 들어 사양길에 접어든 석탄산업을 정부가 나서서 정리하였고, 1988년 12월 석탄산업 합리화 방안이 나왔다. 이에 수많은 탄광이 문을 닫으면서 1989년 이후 석탄 생산이 급격히 줄었다. 태백선과 영동선 따라 폐광촌이 이어지고, 석탄산업 중심지였던 태백도 명맥만 이어가는 형편이다. 작년 2008년 태안광업 한보광업소가 적자 누적으로 결국 폐광이 되고 마는 등, 태백 인구는 계속 줄고 있다. 그나마 남은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경동탄광 상덕광업소 등도 앞길이 그리 밝지 않다는 소식이다.




태백에는 눈이 없다.

통리 골목길을 거닐다가 지난 여행 때 사진으로 담았던 겨울 시골집을 찾아보았다. 그때 그 자리를 찾아 카메라를 들고 다시 서 있건만, 그 시골집은 그 자리에 없었다. 집은 허물어지고 그 빈터에는 못난 연탄재만 뒹굴고 있었다. 스치는 풀잎에 손을 베인 듯한 씁쓸함만 남는다. 지루한 가뭄만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역 앞으로 돌아와도 간판도 떼어버린 낡은 상가 건물에 스산한 바람만 더한다.




통리역 강아지.

통리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모를까, 토요일 오후인데도 사람 발걸음 적은 통리에서 그래도 나를 반겨주는 귀여운 녀석이 있다. 강아지 혼자서 심심했는지 같이 놀아달라고 엉덩이를 뒤로 빼면서 꼬리를 흔든다. 긴긴 가뭄 탓인지 목욕도 제대로 시키지 않아 불쌍해 보일 정도이지만, 그래도 금방 친해져서 생긋 웃음을 안겨준다. 데리고 나가 시골 논두렁길 따라 풀잎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같이 걷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진 찍고 나서 가만히 확대해보니 통리역 강아지 까만 눈에 내 모습이 살짝 비친다.




영동선 스위치백.

통리역으로 돌아와 강릉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열차 시간에 맞추어 그래도 사람이 좀 모이나 싶더니 플랫폼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부리나케 빠져나가면서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허전해진다. 강릉에서 부산 가는 기차로, 주말에만 다니는 임시 열차이다. 이어서 강릉 가는 기차가 도착하고, 몇 사람이 서둘러 계단을 밟으면서 객차 안으로 올라탄다. 기차역 플랫폼은 길고, 1분이라는 정차 시간은 역시 짧다. 이제 영동선 스위치백 산악철도를 오랜만에 다시 타본다.

내가 탄 열차는 도계역을 향해 내려가고, 마주쳤던 열차가 통리역을 향해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창문 밖 풍경으로 흘러간다. 구름과 바람이 지나는 길을 따라가려는 듯 하늘열차는 태백 등마루를 타고 오른다. 어느 곳에 가야 스쳐 지나가는 열차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서로 바라볼 수 있을까. 지나온 길이 머리 위로 보이면서 가야 할 길이 눈 아래에 펼쳐진다. 철길 가까운 곳, 산골 마을 외딴 시골집이 물그림자처럼 흐려지며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고도차가 큰 만큼 산 위에 산이 있는 듯하다.

태백 통리역에서 삼척 도계역까지 심포리역, 흥전역, 나한정역을 차례로 거쳐 간다. 곳곳에 이어진 터널과 아찔한 벼랑길을 지나는 산악철도이다. 먼 길을 돌아 심포리역을 지나고, 흥전역에 기차가 서면서 선로를 바꾸어 뒤로 천천히 미끄러져 간다. 이윽고 나한정역에 다다르면 다시 앞으로 달리면서 도계역을 향한다. 흥전 - 나한정 사이가 바로 스위치백 구간으로, 마치 나뭇잎 떨어지는 것처럼 Z 모양으로 급경사를 내려간다. 기차는 앞으로만 달리지 않는다.




삼척 도계역.

도계역에 내리니 사람은 별로 없어도 역전 거리는 여느 지방 소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시내 풍경이다. 역전을 조금 벗어나 다리를 건너면서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오십천을 비롯하여 험준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은 도계읍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제 까막동네 까만 풍경은 지나간 이야기라고 하지만, 발그림자도 없는 골목길 곳곳에 저물어 버린 탄광촌 모습이 남은 듯하다. 툭툭 듣는 빗방울조차 가리지 못하는 폐가와 오십천 건너 멀리 보이는 오래된 도계광업소 건물 모습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도계를 걸으며, 영화 속 재일이 할머니가 쪼그려 앉아 떡을 팔던 철도 건널목 앞을 가늠해본다. 눈 없는 겨울 이야기는 그랬다.


사진 - 2009.02, 글 - 20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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