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리, 매곡역.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중앙선 철길을 달리다 보면 석불, 구둔, 매곡 등 경기도 동쪽 끝자락 간이역을 차례로 지난다. 구둔역을 스쳐 가고 낡고 좁은 단선 철도 터널 3곳을 하나씩 거치다가 매곡역과 잠깐이나마 만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스쳐 지나가면 그만인 이름 없는 간이역이고, 또 누군가에겐 그리운 고향역일 테니 저마다 다가오는 의미가 다른 곳이다. 비가 그치고 수묵화처럼 하늘을 덮은 잿빛 구름에 눈이 부신 날, 빨간 벽돌집 시골역을 찾았다.

매곡역(梅谷驛)은 경기도 양평에서도 구석진 양동면 매월리에 있는 조그만 간이역이다. 시골 버스조차 오지 않을 만큼 외진 곳이라 승용차가 아닌 다른 교통편은 하루 10회 오고 가는 열차 정도이다. 그 때문인지, 다른 간이역보다 정차하는 열차가 그나마 많은 편이다. 역무원도 발매창구도 없는 시골 간이역이지만, 멈추는 열차도 타고 내리는 사람도 꽤 있어서 쓸쓸하지만은 않다.

철도 현대화 바람에 맞추어, 단선 전철이었던 중앙선도 복선 전철화 공사가 한창이다. 중앙선은 경인선보다 먼저 전철화되는 등 한때는 다른 곳보다 앞선 투자가 있었지만, 경부선과 중앙선을 잇는 충북선보다 나중에 복선화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꽤 늦은 감도 있다. 중앙선을 복선화하면서 2008년 12월 현재 국수역까지 광역전철이 다니며, 2009년 말 용문역까지 확장 개통 예정이다. 앞으로 폐선이 될 석불역, 구둔역, 매곡역을 지나는 구간은 양평군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둔역을 중심으로 공원화할 계획이다. 새 중앙선 철길이 놓일 때면 어떤 모습으로 남을 수 있을지 못내 아쉬울 뿐이다.








시골역 역전 상회.

매곡역을 사진으로 담으며 한참을 머무르다가 역 앞 가게에 잠깐 들린다. 시골역에 잘 어울리는 역전 상회로, 그 흔한 간판조차 없는 시골 구멍가게이다. 근처 텃밭이라도 가셨는지 가게 문이 자물쇠로 잠겨 있고, 주인아주머니, 아저씨 전화번호를 써놓았다. 마침 가까운 곳에 계셔서 전화하니 곧바로 서둘러 오신다.

사진 찍으러 왔느냐는 가게 주인아주머니 말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매곡역이 언제 없어질지 모르고 오래된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러 왔다고 말씀을 드렸다. 근처 구둔역, 양동역이 일제 강점기 1940년에 지은 건물로 70년 가까이 되었지만, 여기 매곡역은 1970년대 초에 신축한 벽돌집 건물이라 아무래도 더 친숙한 느낌이라고 덧붙였다. 아주머니께서 매월리로 시집오신 게 1977년이고, 매곡역은 그때도 이 모습 그대로였다고 하신다. 매곡역이 1968년 9월 보통역으로 영업개시했고, 1972년 8월 역사 신축했으니, 아주머니께서 새댁 소리를 들었을 때는 매곡역이 지은 지 몇 년 안 된, 산뜻한 기와집 기차역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마을 초가집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차이를 보이면서도, 일제 강점기에 지은 건물처럼 억누르려 하지 않고, 서로 어울려 가는 1970년대 시골역 모습도 그려볼 수 있다.

완행열차 서는 곳은 시간이 더디게 가는 듯한데, 지금은 매곡역도 40년이 넘은 인연이 새겨진 낡은 역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1970년대 들어 새마을운동이 펼쳐지면서 시골역도 경제성만 앞세운 콘크리트 성냥갑으로 지어졌고, 기와지붕 얹은 벽돌집 시골역은 매곡역이 마지막이라 할 수 있다. 역사 건축양식도 같은 표준설계로 지은 다른 역을 찾아볼 수 없기에 현재로서는 매우 독특한 건물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 연장 공사를 했던 정선선에서 이러한 시대 변화를 다시 살펴볼 수 있다. 중앙선 매곡역보다 조금 앞서 1971년 준공한 정선선 여량역(현 아우라지역) 역사에서 1960년대식 시골역 모습을 찾을 수 있고, 1975년에 준공한 정선선 구절리역 역사가 바로 전형적인 새마을 양식으로 지어져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구둔역 가다가 길을 잃다.

생수 한 병 사서 마실 물을 채우고, 가게 주인아주머니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나서, 산길 따라 구둔역을 향했다. 길을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차 한 대가 비포장길에 뒤뚱뒤뚱 거리면서 뒤따라온다. 살짝 비켜서서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데, 창문을 내리고 말을 건넨다.

"사진 찍으러 오셨나 봐요.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받은 듯 바로 답을 못하자, 인상 좋게 먼저 웃으면서 다시 말을 건넨다.

"어디에서 뵌 분인 듯싶어서요."

요즘 간이역 탐방하고, 호젓한 시골길 걷는 거 좋아한다든가… 할 말이 생각해보면 많고, 중앙선 기차 타면서 그냥 지나치기만 했던 매곡역을 시간 내어 찾아왔다고, 그렇게 말은 해주고 싶었으나 선뜻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할지 딱 말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렸다.

매곡역에서 구둔역으로 이동하는 데, 철길은 약 4.2km로 굽이굽이 달리는 산악철도라도 5분 거리이지만, 승용차로 가면 양동역 쪽으로 빙 돌아서 대략 19km를 달려야 한다. 이웃마을이라고 해도 산길로 넘어가야 하니 동네 분위기가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바람을 품은 나무 냄새, 빗물을 머금은 풀잎 냄새 맘껏 느끼며 오솔길을 걷는데 길이 흐려졌다. 오프로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는 임도인데, 혹시나 있을 수 있는 산불이 번지는 것을 미리 막는 등 산림 관리하고자 베어놓은 나뭇가지가 곳곳에 어수선하면서 길이 헷갈려졌다. 어디가 임도이고, 어디가 숲으로 들어서는 샛길인지 알 수가 없을 만큼 방향을 잡지 못했다.

잠깐 헤매다가 임도를 다시 찾아가는데, 2시간 넘게 걷는 동안 사람 한 명 없다. 가도 가도 숲 속 오솔길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도 없고, 나물 캐는 아주머니도 없고, 잘 닦인 임도인데도 산악자전거 타는 사람도 없다. 고라니라도 사는지 짐승 발자국이 곳곳에 눈에 띄고, 장끼, 까투리 등 꿩 몇 마리가 갑자기 날아올라 사람 놀라게 하고, 이따금 멀리서 들리는 기차 소리 빼면 새 소리, 바람 소리뿐이다. 끝이 궁금했다.




다시 매월리?

산길을 꽤 걷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오기는 했는데, 생뚱맞은 철길이 보인다. 어리둥절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근처 공사장 아저씨한테 길을 물었다. 이런, 산길을 한참 헤매고 찾은 곳이 처음 출발한 매곡역에서 조금 떨어진 매월리 마을 입구였다. 다시 길을 찾아 안심이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묘한 경험을 하고 말았다.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차를 얻어타면서 어느 쪽이 양동역이고, 매곡역인지 다시 확인하고 매곡역 근처까지 갔다. 인사를 드리고 차에서 내려 몇백 미터쯤 걸었을까. 철길과 나란히 이어진 길을 조금 걸어가니 매곡역이 보인다.

날이 더워지면, 아니 언제라도 좋으니 앞마당 넓은 시골집 같은 매곡역으로 다시 와서, 그리운 외할머니처럼 아늑한 처마 밑 그늘에서 산들바람 즐기며 책이라도 한 권 펼쳐보고 싶다. 매곡역은 매월리를 닮았다.


사진 - 2009.04, 글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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