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처럼 떠 있는 플랫폼 위 간이역.

경춘선에는 플랫폼에 역사를 지은 역이 3개나 있었다. 경춘선 복선 전철화 공사를 하면서 맨 처음 평내역이 폐역이 되고 평내호평역이 새로 생겼으며, 상천역도 하루아침에 허물고 임시 역사로 옮긴 지 한참 되었다. 플랫폼 선상에 역사가 있는 역은 이제 백양리역 하나 남았다.

백양리역은 조그만 맞배지붕이,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그런 그림 같은 집 모양이다. 역명판이 이를테면 백양리역이라고 할 때 역 바깥은 '백양리역', 역 안쪽은 '백양리'로 써놓는 형식인데, 백양리역은 플랫폼 위에 역사가 있으니 안팎이 뚜렷하지 않다. 맞이방 쪽에 '백양리'로, 반대쪽에 '백양리역'으로 걸어놓았다. 맞이방에는 경사진 차양이 있고, 이웃 경강역처럼 오래된 나무 미닫이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중앙선 철길 초입에 있는 팔당역도 플랫폼에 역사를 설치한 드문 형식이고, 일제 강점기 후반 철도 역사 건축 양식이 잘 남아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밖에 멀리 부산에 있는 동해남부선 거제역도 플랫폼 위에 역이 있다.

백양리역도 몇 안 되는 독특한 형식이고, 미닫이문만 봐도 보존 상태가 더 좋은 듯한데,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했다. 맞이방 안에 코레일 이름으로 붙인 안내판에는 백양리역사를 1937년에 지었다고 나왔는데, 경춘선 다른 역들이 전쟁으로 역사가 소실되면서 1950년대 후반에 역사 신축한 곳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백양리역사도 전쟁 포화 이후 고쳐 지은 것이 아닐까 한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내 몸에 와 닿는 햇살도 눈 부시지만 꽃가루 제법 날리는 날이다. 맞이방에서 잠깐 카메라를 손보면서 쉬는데, 나물 캐러 오신 듯한 아주머니 한 분께서 짐을 꾸리시며 기차 탈 채비를 하신다. 플랫폼 위에 역사가 있어서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기차 때문에 건물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린다. 백양리역에 정차하는 열차는 하행 세 번, 상행 네 번이 전부다. 무인역에서 볼 수 있는 요란한 열차 접근 경보장치와 함께 지금 막 멈춘 열차는 청량리역으로 가는 그날 마지막 상행 열차편이다. 플랫폼에 내려 주변을 살피던 차장 아저씨가 사람 좋은 얼굴로 안 타는지 물어본다. 무인역은 모처럼 열차가 정차해도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을 때가 흔하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간이역에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갈 길을 재촉해야 하는 철도원 심정은 어떨까. 다른 경춘선 역들이 그렇듯, 이곳 백양리역도 머지않아 폐역이 될 처지이다. 생각처럼 될지 모르겠지만, 눈 내리는 겨울날 백양리역을 다시 찾고 싶다.






추억이 가득 새겨진 강촌역.

역명은 으레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르기 마련이다. 속뜻이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름답고 고운 마을 이름으로 수색과 강촌을 들 수 있다. 수색(水色)은 물빛마을이라는 뜻이고, 강촌(江村)은 물가마을이다.

물가마을, 강촌 옛 명물은 등선교, 일명 출렁다리였으나 낡은 교각만 그 흔적으로 남았다. 지금 명물은 강촌역 피암터널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볼 수 있는 모습처럼 강촌역 플랫폼에 피암터널을 설치한 해가 1995년으로, 경춘선 초기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것은 물론 아니지만, 자리를 잡을 만한 시간이 지났다. 플랫폼이 터널식 구조로 된 것만으로 한국에 하나뿐인 매우 보기 드문 진풍경이며, 강촌역 상징은 역시 피암터널 수많은 기둥을 가득 메운 낙서들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둥에 낙서하고 그 곁에 서서 추억을 찍었을까.

강촌역은 역사 건물보다 플랫폼이 더 기억에 남는 곳이라 이야기할 수 있으며, 단선 철도인데도 마주 달리는 데 꼭 필요한 대피선도 없이 본선 1선뿐이고, 기차역 밑에 카페가 있는 것도 여전하다. 무척이나 친숙한 곳이지만, 다시 살펴보면 참 보기 드문 특이한 기차역이다.




사라진 경춘선 통일호처럼.

통일호 열차는 2004년 3월 31일 경춘선에서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98년 비둘기호를 (정선선을 제외하고) 폐지하기에 앞서 1990년대 중반부터 통일호 열차편을 줄이고 중장거리 노선 대부분을 무궁화호로 바꾸었다. 그뒤로 한동안 통일호 열차가 통근열차를 겸한 완행열차로 다닌 셈이다. 경춘선만큼은 무궁화호와 통일호를 비슷한 횟수로 계속 운행했는데, 다른 노선보다 거리가 짧고, 도시와 도시를 (서울과 춘천 사이를) 이어 주는 간선이라기보다 대성리역이나 강촌역 등처럼 중간에 머무는 역 수요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경춘선은 그렇게 통일호 열차가 늦게까지 부지런히 달렸고, 가장 잘 어울리는 철길이라 할 수 있다.

춘천 가는 기차가 옛이야기가 되기 전에, 무궁화호 열차조차 다니지 않는 폐선이 되기 전에 다시 와서 보니 낙서 대신 그라피티가 가득한 강촌역이 뭔가 좀 낯설다. 그렇다고 낙서 천국 강촌역이 어디 가지 않는다. 그라피티 위에 새 낙서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가장 많은 사람이 찾은 간이역, 경춘선 강촌역에 얽힌 인연이나 추억은 한 아름에 담을 수 있는 깊이가 아니다. 굳이 모꼬지나 수련회가 아니어도 덜컹거리며 굽이굽이 돌아가는 낡은 통일호 열차, 강으로 산으로 함께 달렸던 강촌역 자전거, 저녁이면 장작이 타오르고 아침이면 북한강 물안개가 반겨주는 민박집 등등 지나간 이야기는 강물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앞으로 강촌역은 구곡폭포 부근 산으로 옮겨가면서 이름만 강촌역인 산촌역이 된다. 이웃 역, 백양리역 가까운 곳에 광역전철이 다닐 새 백양리역이 한창 공사 중이다. 강줄기 따라 흐르는 옛길과 달리 멋없이 죽 뻗기만 한 고가철도이나 그나마 북한강 가까이 있는 새 백양리역이 강촌 역이 될 듯하다.


사진 - 2009.05, 글 - 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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