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가는 기차.

햇살 좋은 날이면 춘천 가는 기차를 타 보고 싶다. 하늘빛 가득 머금은 북한강 줄기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낡은 단선 철길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열차 안에 몸을 맡기고 싶다. 가평을 지나 강원도 춘천으로 접어들어 경강역 - 백양리역 - 강촌역 - 김유정역으로 이어지는 강변철도가 바로 그것이다. 강물 위로 흘러가는 구름 그림자처럼 스쳐 가는 강촌역과 김유정역 사이가 유난히 아름다우며, 초입에 들어선 경강역은 김유정역과 함께 경춘선에서 가장 서정적인 역으로 이름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철길도 늘 그 자리에만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경춘선 복선 전철화 공사로 경기도 구간은 이제는 그때 그 길이 아닌 곳이 있으며 대성리역처럼 이미 철거한 역도 많고 이래저래 온통 어수선하여 너무 늦게 다시 찾았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그래도 강원도 춘천 경강역과 김유정역 사이는 신선과 구선이 서로 다른 길이기에 공사 구간과 떨어져서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반긴다. 경춘선 통일호가 없어진 지 벌써 꽤 되었고,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북한강과 함께하는 단선 경춘선을 달려 추억 속으로 가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시골역 옛 이름.

어느 역이든 이름이 있기 마련이다. 경강역 옛 이름은 서천역이었다. 옛날 소설에 나오는 묘연한 여인 이름처럼 들리기도 하고, 아침 이슬 가득 머금은 대나무 숲처럼 수수한 맵시가 나는 이름이다. 춘천 남산면 서천리 마을 이름 따라 서천역으로 문을 열었으나 먼저 생긴 장항선 서천역과 이름이 같아 경기도와 강원도 머리글자를 따서 경강역이라 역 이름을 고쳤다고 하는데, 발음도 어렵고 그다지 예쁜 이름은 아닌 듯싶다. 옛 이름이 더 마음에 들고 그게 그 자리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여긴다. 한편으로는 호남선 강경역과 역 이름이 헷갈리기도 하여 강경역 대신 경강역에서 잘못 내린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믿을 듯하다.

이곳 경강역에서 내려 시골역다운 낡고 조그마한 맞이방을 지나 마을로 나설 때와 역 바깥에서 볼 때가 사뭇 다른 느낌이다. 경강역을 역 앞에서 보면 상업화된 강촌 관광단지 한구석에 옛날 시골역 모습 그대로 있어 이채롭다. 김유정문학촌을 만드는 등 관광개발 시도에도 여전히 춘천 시내와는 산 하나 두고 떨어진 조그마한 시골 마을 기차역으로 주변 풍경과 함께하는 김유정역과는 다른 모습이다. 현실에서 일탈하여 흘러간 영화를 다시 꺼내어 보는 듯, 경강역 맞이방으로 들어서면 추억으로 가는 승차권을 얻은 기분이다.

경춘선은 1939년 개통했지만, 전쟁 때 불타고 부서진 역이 많아 대부분 1950년대 후반에 새로 다시 지었다. 경강역도 1958년에 역사 신축했으며, 같은 해 새로 지었고 건축 양식이나 모양이 거의 같은 역으로 중앙선 국수역과 간현역을 들 수 있다. 경기도 양평 국수역 구 역사는 안타깝게도 철거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현대식 전철역 건물이 들어섰으며, 강원도 원주 간현역은 넓은 모래사장 있는 계곡이 좋아 찾는 이도 많지만, 중앙선 복선 전철화 공사가 끝나면 폐역이 될 예정이다.

빛바랜 빨간 벽돌이 아담한 경강역에는 옛날 나무 미닫이문이 그대로 남아 있어 정겹다. 유리창에 성에 가득 앉은 추운 겨울날 소복이 쌓인 눈밭을 지나 역 앞에 도착해 낡은 미닫이문을 힘겹게 드르륵 열면 큼직한 주전자가 한 귀퉁이 찌그러진 투박한 난로 위에서 기차 도착 시간에 맞추어 모락모락 따뜻한 김을 내뿜고 있을 법하고, 햇살이 가볍지 않은 여름날에는 한껏 열어놓고 바람꽃과 매미 소리를 맞이하다가 뜬금없이 소나기라도 후드득 내리면 반소매 차림 시골 역장님께서 짧은 차양 밑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어서 비를 피하라고 반겨줄 듯하다. 수십 년이 넘은 오래된 역사라도 맞이방 문을 여닫이로, 그것도 현대식 유리문으로 바꾸어 달아놓은 곳이 많은 걸 생각하면 이제는 참 보기 드문 모습이다.




늘 푸른 전나무.

시간 속에 빛바랜 역에는 늘 곁에 있는 역목이 있어 아름답다. 경강역은 늘푸른큰키나무, 전나무가 눈부시다. 한 아름 키 큰 전나무가 조그마한 시골역을 차분하게 둘러싸 준다. 키다리 전나무는 겨울날에 눈꽃 가득 머금어도 늘 푸른빛으로 서서 역을 찾아오는 이를 반겨주고, 여름날이면 말없이 그늘을 가득 만들어준다. 이곳에서 만나고 헤어진 수많은 인연을 하나하나 지켜보았을 테고, 경강역과 함께한 시간을 뿌리 깊이 새겨두었을 듯하다. 경춘선 경강역이 아니라면, 어느 역에 가야 이렇게 키 큰 전나무가 반겨줄까.

간이역에서 시인은 인연을 노래하고, 화가는 추억을 그리고, 사진가는 시간을 담는다. 이런 시골 기차역을 때로는 영화나 TV 드라마를 통해 만나기도 하는데, 김유정역이 MBC 드라마 「간이역」 촬영 장소였다면, 경강역은 박신양, 최진실 주연 영화 「편지」 촬영역이다. 고 최진실 씨가 유명을 달리하면서 그를 추모하여 팬들이 받친 꽃이 역 벤치에 한동안 가득했다는 얘기가 벌써 지난 일이 되었다. 경강역 맞이방에는 그가 남긴 손자국과 사진이 이제는 볼 수 없는 이가 남긴 자취이기에 더욱 애잔하다.

장미꽃 소담스럽게 피는 5월 경강역은 키 큰 전나무 그늘이 한가롭고 맞이방 낡은 나무 벤치가 넉넉하다. 다른 계절이 찾아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소리를 삼키는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 춘천 가는 겨울 기차 타고 이곳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기차가 올 시간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시던 시골 역장님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경춘선 경강역은 너무 늦게 찾으면 아쉬움이 남을, 그런 역이다.


사진 - 2009.05, 글 - 2009.07.


Copyright © As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