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가는 밤기차.

스무 살 무렵 홀로 떠났던 길을 다시 찾아 나선 지 여섯 달째, 일 년이 걸릴지 이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짧고도 긴 여행이다. 차창 밖 풍경으로 별다른 존재감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 모르는 간이역을 찾아서 사라진 시간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가슴 아린 내 지난날을 찾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장맛비 내리고 여름이 깊어가면서 문득 길을 잃은 느낌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눈을 돌리니 동해 바닷바람이 다시 생각났다. 강릉 가는 밤기차를 타고 동해 한곳으로 달려가 바닷바람에 눈시울을 적시고 마음을 달랬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마음속으로 꿈꾸었던 동해를, 신발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모래알조차 서늘한 바다를 한참이나 나 홀로 걷고 또 걸었다. 장마가 잠깐 걷히면서 해돋이 역으로 그렇게 떠났다.

강릉 가는 밤기차는 그때처럼 사람 붐비던 통일호 열차가 아니다. 영동선 동해 ~ 강릉 구간 전철화로 동해역에서 전기 기관차를 디젤 기관차로 바꾸어 연결하지도 않는다. 동해역이나 강릉역에서 비둘기호 열차로 갈아탈 일도 없다. 신형 전기 기관차로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에 몸을 맡기지만, 마치 기나긴 터널을 지나가는 듯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을 거치면서 새벽 동틀 무렵을 향해 달리는 완행 야간열차라는 건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침묵을 깨는 빛이 보인다.

문득 눈을 뜨니 차창 밖으로 노을진 바다가 스쳐 간다. 어둠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여명이 떠오르는 동해다. 조금은 부산스럽게 정동진역에 기차가 서니 새벽 5시가 다 되었다. 내가 탄 기차가 멈추기도 전에 먼저 찾아온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보인다. 바다와 함께하는 정동진역답게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에 발을 디디고 몇 걸음만 걸어가면 바로 바닷가 모래밭인데, 예전에 없던 울타리가 길을 막는다. 해가 뜰 때가 다 되어서 역을 나와 바닷가 모래사장까지 걸어갈 수 있는 여유가 없기에 키 작은 해송 곁에 있는 역 벤치에 함께 앉아 해돋이를 맞기로 했다. 이곳을 찾은 모든 이가 동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음속에 불빛을 켜고 해돋이를 기다린다. 어둑어둑한 극장에 자리를 찾아 앉아 여명이라는 예고편을 보면서 영화 시작을 기다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비바람이 그치거나 황사 바람이 지나가면 유난히 산뜻한 노을을 만날 수 있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눈에 들어오는 새벽 노을은 더욱 빛이 나기 마련이다. 구름에 가려 수평선에서 바로 뜨는 해를 볼 수 없을지라도 새벽 동해를 감싸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꿈을 담을 수 있었다. 노을이 시나브로 붉어지면서 해가 뜰 시간이 다가왔지만, 낮게 깔린 잿빛 구름에 여전히 모습을 감추어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 기다림도 잠시, 구름 사이로 침묵을 깨는 빛이 보이면서 너울너울 물결 치는 바다 위로 다다를 수 없는 길을 만들었다.


파도 소리 가까운 곳.

해돋이를 보면서 상상이 현실이 되었고, 아침 햇살에 붉게 물든 가슴이기에 파도 소리 가까운 곳으로 더욱 가고 싶었다. 아쉽게도 역을 나오면서 추억에서 허무로 변한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역전 시장 바닥을 서둘러 벗어나 바닷가 모래밭에 발을 디딘다. 비바람이 지나간 잔잔한 물결인데도 물보라 부서지는 소리가 은근히 크다. 손이 닿지 않아도 찰랑거리는 바닷바람이 좋았고, 몸에 살짝 와 닿는 소금가루가 끈적거려도 좋았다. 정동진역에서 파도를 담고, 시간을 담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7월 여름 해를 피해 딱딱한 나무 벤치 있는 좁은 맞이방에서 함께 쉬면서 다리를 쭉 뻗어본다. 기념사진 찍는 사람들 가만히 구경하다가 열차 도착 시간보다 조금 앞서 플랫폼으로 다시 나왔다. 아쉬운 마음에 사진 몇 장 더 담아본다.

정동진역은 낮고 포근한 지붕이 강릉 바닷가 시골집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눈이 많이 오는 바닷가 역이라 그런지 짧은 처마 밑에 일자형 차양이 넓게 도드라진 게 여느 역과는 다르다. 1962년, 같은 해 지은 이웃 옥계역, 안인역은 지붕을 고치면서 모습이 달라졌으나 정동진역은 기와지붕 그대로 남아 있다.

정동진역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강릉역보다 타고 내리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아질 정도이나 현대식 역사로 바꾸지 않고, 고집스럽게 옛날 시골역 모습으로 손님을 맞고 있다. 각종 호객 행위가 난무할 정도로 시끄럽고 어지럽게 변한 역전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다시 찾은 정동진역은 마음속 그곳이 아니게 되었다.


사진 - 2009.07, 글 - 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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