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소리를 찾는 길.

여행은 익숙한 소리에서 벗어나 그리운 소리를 찾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곳이든 저마다 다른 소리를 들려주고, 사람도 끊임없이 귀 기울이며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확인하려 애쓴다. 때로는 포근함을 느끼고, 때로는 낯설음에 잠 못 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지난날에 밤기차 타고 동해 바닷가로 가고 싶었던 것도 이른 아침 찬바람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가슴 아리도록 그리웠기 때문이었나 보다. 자동차 소리와 컴퓨터 팬 소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라면, 덜컹거리는 낡은 철길을 굽이마다 기적 소리 내면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내 지난날로 떠나는 여행이라고 할까. 경춘선, 중앙선, 태백선, 정선선, 영동선, 그리고 경전선으로 떠난 길이었고, 그렇게 만난 시골역에서 잊고 지내던 소리를 찾아다녔다.

먼 길을 가면서 한곳에서만 머물 수 없기에 많은 것을 놓치기도 한다. 애써 찾지 않으면 가슴 속에 가늠할 수 없는 그리움을 간직한 채 감각이 무디어지기를 기다리기만 한다. 흘러간 영화 한 편이라도 뒤늦게나마 보고 마음속에 남겨두어야 한다. 길은 하나이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아쉬움이 남을 때.

한걸음 서두르지 못해서 너무 늦게 찾았다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꽃이 지고 잎이 떨어져도 떠나간 계절은 다시 오기 마련이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 없기에 쓸쓸함만 남을 때도 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아도 해를 거듭하면서 달라지고 때로는 물을 흠뻑 먹었던 진흙 덩어리가 메마르고 메마르면서 흙먼지가 되듯 바람에 흩날리기도 한다.

보성 명봉역이 그랬다. 남평역은 소설 「사평역」에 나오는 톱밥 난로에 던져 넣을 땔감 걱정하던 역장을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시골 역장님이 아직 있었지만, 명봉역은 지난해에 역무원이 떠나면서 바람만 스산하게 부는 무인역이 되고 말았다. 명봉리는 보성과 신천리를 오가는 시골 버스가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을 만큼 구석진 곳이고, 화물 취급과 역 근처 급경사 구간 때문이라도 다른 곳보다 늦게까지 역무원이 계속 있었으나 지금은 무인역을 지키는 명예역장님 자원봉사에 기대는 형편이다. 그나마 역사가 그대로 있고 기차가 서는 곳이기에 남은 아쉬움을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마을 사람 수가 비슷비슷한 시골역이라도 어떤 곳은 기차가 하루에 몇 차례나마 서고 또 어떤 곳은 섭섭하게도 그냥 지나간다. 여전히 버스 타기 불편한 마을이라면 간이역에 기차가 가끔이라도 머물다 가고, 시골 버스가 나름대로 잘 다니는 마을은 열차 시간표에 관심이 덜 가기 마련이다. 다른 한쪽을 보면 시골 버스도 사람 없기는 완행열차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명봉역은 문 앞에 삭막하게 써놓은 안내문이 아니어도 메마른 널빤지로 막아 놓은 창문이 무인역임을 말해주지만, 그동안 다녔던 다른 무배치간이역과 다르게 꼭 어디엔가 역무원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역무실로 가서 역 구경 왔다고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서늘한 발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저물어 가는 계절.

명봉(鳴鳳)은 봉황이 우는 마을로, 풍수지리로 보면 봉화마을 뒷산이 봉황 수컷 '봉'이고 봉동마을 뒷산이 봉황 암컷 '황'이며, 명봉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그리워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형국이라 한다. 낡은 구식 철제 역명판으로 만든 역 이름 안내문이 눈에 들어온다.

둥글둥글한 산으로 감싸 안은 마을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이 찾아오면 어느 곳보다 아늑하겠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좁은 골짜기에 터를 잡아서 세찬 바람 불기 쉬운 곳이다. 은행나무, 벚나무가 한창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어야 할 남도 시골역이건만, 다가올 철을 알리는 아스스한 바람 탓인지 이미 잎은 지고 또 떨어져서 메마른 곳이 되고 말았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경전선 낡은 철길을 달리는 완행열차에서 내려 명봉역 플랫폼에 발을 디딘 날에도 제법 찬바람이 파고든다.

늦가을조차 저물어 가는 듯 거친 바람에 모자가 덩그런 플랫폼 저쪽으로 날린다. 떨어진 모자를 추스르는데, 누군가 기념사진 한 장 부탁한다. 삼각지붕 아래 하얀색 역명판이 보이는 배경을 잡고 그 프레임 안에 사람 얼굴이 들어오도록 발걸음을 조금 옮겨달라고 주문을 넣어본다. 명봉역이 TV 드라마 「여름향기」 찍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기차 타는 사람보다 역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보성 다원을 관광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려 구경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명봉역 앞마당에 봄빛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와 소담스럽게 물든 꽃잔디가 어우러질 때면 사람 목소리, 카메라 셔터 소리 제법 들리는 곳이 된다. 햇살이 따사로운 날이면 플랫폼 한가운데 예쁘게 자란 측백나무 그늘에서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 하나하나 헤아려 보고 싶은 곳이지만, 쌀쌀한 날씨 탓에 그런 느긋함은 접어두어야 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열차 시간이 다 되었다.

먼 곳으로 가는 길에 때로는 간이역에 내려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동안 어떻게 왔는지 가만히 뒤돌아보는 것도 꽤 괜찮다. 간이역에서 휴식을 얻고, 나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머물지는 말아야 한다. 열차 시간이 다 되어서 서둘러 플랫폼으로 달려가도 기차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기차는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고 탈 사람이 누구일지라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진 - 2009.11, 글 - 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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