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반곡역 가는 길.

가을비는 두 번 내린다. 처음 내린 비에 가을빛으로 시나브로 물들어가고, 다시 내린 비에 가을잎이 저물어간다. 밤사이 스며드는 빗소리가 멀어져 가면 나뭇잎 떨어지는 냄새 따라 길을 떠난다.

아침 일찍 서둘러 카메라를 챙기고 반곡역 가는 길목에 다다르니 성긴 빗방울이 툭툭 듣는다. 치악산 자락 따라 아직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정답게 반겨준다. 가을비 내린 아침에는 은행나무가 붉은빛을 드러낸다. 때마침 정선 가는 기차가 늦가을 비에 젖어든 치악산을 타고 오르다가 반곡역에서 숨을 고르면서 잠깐 쉬었다 간다. 곧 반곡역을 힘차게 벗어나 치악산 똬리 굴을 휘감아 돌아 나오면서 치악역, 신림역을 차례로 지날 터이고, 제천역에서 태백선으로 접어들어 민둥산역을 돌아 정선 아우라지로 계속 달리는 열차이다. 기차 안에서는 이름 모를 역에 머물다 갈 뿐이라고 여길까.




가을을 떠나보내는 반곡역.

반곡역 앞마당에 들어서니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가랑잎이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곤거린다. 지난여름 방문 이후 궁금했던 반곡역 벚나무 고목 두 그루는 가을을 떠나보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름이 저물어 가면서 벚나무 잎사귀 하나 둘 노랗게 물들어가고, 계절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리면 뉘엿뉘엿 해가 지듯 붉게 젖어들고, 지금처럼 가을비 다시 내리면 계절을 떠나보낼 시간이 다가온다.








반곡역 갤러리와 영혼 추모탑.

깊어가는 가을에 반곡역 갤러리가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보았다. 카나비에서 지역 미술작가 5인과 함께 반곡역사 미술공간만들기위원회를 구성하고, 2009 마을미술 프로젝트 사업으로 지원을 받은 '철도역사(歷史)를 담은 미술역사(驛舍) 만들기'가 결실을 거두었다. 일제 강점기 중앙선 철도 건설 역사 자료를 토대로 당시 반곡역 근처 철도 공사 현장, 똬리 굴 형상, 옛 백척교 등을 한국화, 유화, 판화, 조각으로 작품화하여 상설 전시한다. 반곡역 맞이방에서 그림과 설치 작품을 전시하며, 반곡역사 옆 소공원에서 조각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조선인 피와 땀이 스며들어 만들어진 중앙선 철도 역사를 되새기면서 영혼을 추모하는 작품이 주를 이룬다.

중앙선 복선 전철화 사업이 끝나면 원주 반곡역은 폐역이 되는데, 이는 한국철도공사 관리 목록에서 반곡역이라는 이름이 지워진다는 얘기이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원주 반곡역사는 문화재청으로 넘어간다.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이름만 거창한 빈 껍데기로 남는 것이 아니라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기차역 미술관으로 거듭나면서 기차가 다니지 않는 역이 되어도 원주 문화인으로부터 계속 사랑받는 쉼터로 남는다.

반곡역 갤러리라는 새 이름표를 달았지만, 비가 오는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미술 전시관으로 바뀐 반곡역 맞이방은 한쪽 문이 아쉽게도 닫혀 있었다. '똬리굴', '철도노역 군상', '영혼 추모탑' 등 바깥에 설치한 조각 작품은 물론 여유 있게 볼 수 있었다. 반곡역에도 벚꽃이 피면서 늦은 봄을 알릴 때 다시 올 수 있을까.




기차가 서지 않는 역에서.

열차시간표 없는 산골 역에 비가 내린다. 처마 끝으로 톡톡톡 떨어지는 빗물에 무엇을 담았을까. 비 오는 날은 감각이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가을비가 여전히 내 몸을 적신다. 내 몸을 적시면 그치기를 바라지만, 구름이 걷히면 빗소리를 그리워한다.


사진 - 2009.11, 글 - 2009.11.


Copyright © As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