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쯤 왔을까.

가을비 내리면서 스산한 바람 부는 늦가을인가. 저만치 끝을 보이며 가만가만 저물어만 가는 한 해가 아쉬울 뿐이다. 책 한 권과 카메라로 채비하고, 내 마음속에 그리던 간이역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이제 슬슬 매듭지을 때가 온 모양이다. 겨울, 봄, 여름, 가을에 걸쳐 떠나면서 어느덧 몇 개 역 남지 않았고, 무엇을 찾아 떠났던 여행이었는지 처음 만났던 능내역을 닮은 간이역에서 다시 더듬어 보고 싶었다.


사라져 가는 낡은 철길.

중앙선 철길은 지금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한창 공사 중이며, 수도권 광역전철 국수역 ~ 용문역 구간 개통을 앞두고 있다. 용문역, 지평역을 차례로 지나 이어지는 석불 - 구둔 - 매곡 - 양동 구간은 청량리역을 출발한 열차가 중앙선 따라 달리다 처음 만나는 산악철도이면서, 신선과 구선이 따로 떨어져 있기에 어수선한 공사 구간을 피해 아직 옛 중앙선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낡은 철길이기도 하다. 지평역은 새 역사로 이미 옮겼고, 양동역도 지은 지 70년이 다 된 오래된 역사를 아낌없이 허물어 버리고 임시 역사로 손님을 맞고 있다. 석불역, 구둔역, 매곡역은 지금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새 역으로 옮겨 간다.

양평군에서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둔역을 중심으로 석불역, 구둔역, 매곡역을 지나는 폐선 예정 구간을 관광철도로 공원화할 계획이라 하지만, 구둔역사 보존 외에는 어떻게 될지 불투명할 뿐이다. 능내역이 그렇듯 폐선, 폐역이 되면서 한동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녹슨 철길에 빈 껍데기만 남지 않을까 한다.

긴긴 세월 함께해 온 시골역이 하나 둘 계속 지워지는 요즈음, 청량리역에서 강릉 가는 기차를 타고 중앙선을 달리다가 첫 번째 만날 수 있는 오래된 시골 간이역이 바로 양평 석불역인 셈이다. 석불역은 능내역과 같은 해 (1967년) 역사를 지었고, 지금은 철거된 옛 아신역사와도 닮은꼴이다.




알 수 없는 역 이름, 석불역.

석불역(石佛驛). 돌부처라는 두드러지게 다른 역 이름 때문에 갖은 추측이 나오는데, 어떻게 붙여진 역 이름인지 알려지지 않아 더욱 그렇다. 석불역 주소가 행정 구역으로는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망미리이고, 지도를 펼쳐 보아도 역에서 가까운 마을 이름으로 안섬부리, 바깥섬부리 정도 나올 뿐이다.

답은 망미리 역사 자료에서 쉽게 나왔다. 1914년 지방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론리, 석불리, 신대리를 합쳐 망미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망미리로 이름을 붙이고 지평면에 편입하였다. 돌부처가 서 있다 해서 이름 붙은 석불리가 망미리 으뜸 마을이고, 발음하기 편하게 섬부리로 바꾸어 불러온 셈이다. 석불역 가는 길에 돌부처는 보이지 않았지만, 직지성보박물관 소장품으로 양평 출토 종 탑본 설명문으로 보건대 석불역 앞이 고려 후기 옛 절터였던 듯하다.


석불역 가는 길.

석불역은 섬부리 마을을 지나는 길에서 벗어나 논두렁길 따라 산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조그만 시골 간이역이라도 역 앞마당쯤은 있기 마련이며, 능내역처럼 작은 역도 승용차 두세 대는 주차할 수 있는 마당이 있었고, 플랫폼 위에 역사가 있는 백양리역조차도 역 입구에 터가 있다. 하지만, 석불역은 산비탈에 지어놓았고 앞마당도 없이 철로가 있는 역 안쪽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맞이방을 보면 철로 쪽 여닫이문과 달리 바깥쪽은 낡은 나무 미닫이문으로 남아 있어 서로 어긋나있다. 역사 정문이라고 하지만 문을 나서면 나무만 우거진 비탈이어서 역을 나설 수 없으니 바람이나 드나들었을 테고, 부드럽게 열고 닫히는 반곡역 미닫이문과 달리 괜히 열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상당히 뻑뻑했다. 몇 평 안 되는 작은 맞이방에 놓인 나무 벤치는 특이하게도 키 작은 할머니라도 다리 죽 뻗고 편히 앉으실 수 있을 정도로 높이가 낮았다.








사람 없는 간이역.

양평에서 지평역, 구둔역, 양동역은 중앙선 개통 초기부터 있었고, 석불역과 매곡역은 1960년대 말에 새로 만든 곳이다. 역과 역 사이가 멀다 보니 열차 신호 제어를 하거나 단선 철길에서 마주치는 열차가 엇갈릴 수 있도록 대피선을 갖춘 역이 더 필요했을 테고, 약 4km마다 끊어서 추가한 역이 석불역과 매곡역이라 할 수 있다.

용문역을 지나 지평면, 양동면에 들어서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구석진 동네라서 기차가 주요 교통수단이었고,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막 착공하던 때였으니 당시 시골 간이역은 이미 놓인 철도를 활용하여 적은 예산으로 교통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석불역 앞은 지금도 논밭이며 마을에서 집이 모여 있는 곳과 거리가 조금 있어 다른 시골역보다 이용하기가 불편한데도, 한때는 하루 300명 이상 타고 내렸고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200명 이상 찾았던 곳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통근열차 타고 학교 가는 학생이 있었을 테고, 몇 사람 앉으면 자리가 차는 맞이방에는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 몇 분께서 기차를 기다리며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셨을 듯하고, 맞이방 입구 차양 밑에는 보따리 짐이 가득 놓여 있고, 완행열차 서면 플랫폼에 사람이 붐볐을 그림이 그려진다.

이웃 마을 양동면은 경기도에서 가장 외진 곳인 탓에 아직 버스보다 기차를 선호하면서 양동역을 찾는 사람이 꽤 많고, 양동면 매월리 매곡역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 사정은 비슷하다. 지평면 지평역과 석불역에 사람이 많았을 때 분위기가 어땠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이제는 광역전철이 닿는 곳이라면 모를까, 어느 시골역이든 기차 타는 사람이 줄었다. 시골에 사람 수가 줄어든 게 가장 큰 까닭일 테고, 승용차나 버스를 타지 않고 간이역에서 하루에 몇 번 서지 않는 기차를 열차시간표에 맞추어 기다릴 필요가 별로 없어진 탓도 있다.




외딴곳, 외로운 간이역.

잡초나 자라는 허름한 간이역 플랫폼에도 기차는 선다. 다섯 시도 되지 않았지만, 기차가 하루에 몇 번 서지 않는 이곳에서는 서울 청량리역으로 가는 그날 마지막 열차편이다. 천천히 사진 찍으며 기차 올 때를 기다리는데, 차 한 대가 역 안으로 들어와 서더니 몇 사람 내려주고 다시 떠난다. 등산복 차림이었지만 이 동네와 연고가 있는 분인 듯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새 철길이 놓이면서 석불역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아저씨는 폐선이 되면 관광철도로 바뀐다는 소식을 알고 계셨지만, 할머니 한 분은 다소 놀라시면서 아쉬워하셨다. 자리를 옮겨 새로 지을 석불역은 지금보다 마을 가까이 있어 조금은 편리해지겠지만,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석불역은 외딴곳, 외로운 간이역이다. 호젓한 곳에서 나를 찾기에 좋은 곳이라고 할까. 하지만, 세월이라는 먼지가 소복이 쌓인 이곳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사진 - 2009.11, 글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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