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갈 때


계절이 깊어가면서
가장 떠나고 싶을 때는
가을비 그친 다음날이다.
밤사이 내린 우레비가
가을빛을 짙게 부른다.

이른 아침 떠나면서
하얀꽃 피어나는 입김에
발걸음을 서둘러 본다.
아스스한 가을바람은
설레임을 다시 부른다.





정선 가는 기차.

가을 아침 쌀쌀함도 잠깐, 정선 가는 기차 안에 잠이 덜 깬 몸을 맡기니 아침해가 따뜻하다. 내 몸을 감싸는 햇살이기에 눈이 부셔도 좋았다. 낡은 기차가 덜컹거리며 굽이굽이 돌아 산을 타면서 열차 창밖으로 손에 닿을 듯 너울거리는 가을빛이 그윽하다.

산길 따라 태백선을 한참 달리다가 귀가 멍해지는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 자작나무 숲이 바라보이는 자미원역에서 잠깐 숨을 고르고, 민둥산역에 머물다 다시 부지런히 떠나면서 정선 철길로 들어선다. 꼬마열차는 그리운 별어곡역을 지나 회오리바람에 구르는 낙엽을 뒤로하면서 선평역으로 달린다. 가만히 눈을 감아봐도 굽이마다 울리는 기적 소리로 기차가 정선 철길로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바람만 머무는 산골 간이역.

이내 도착한 정선 선평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역시 나 혼자뿐이다. 한때는 제법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역이었으나 이제는 누군가 내리는 사람이 있는 게 어색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 열차에서 내려 카메라를 들고 플랫폼에서 서성거리는 나를 보고 차장 아저씨가 눈짓한다. 저는 여기에서 내리니 어서 떠나시라고, 안녕히 가시라고, 아우라지역에서 열차를 되돌려 이곳에 또 설 때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손짓한다.

산골 간이역은 곁에 있는 산을 닮았다. 둥글둥글한 민둥산을 닮은 별어곡역처럼 선평역도 정선 산등성이를 닮았다. 계절이 깊어가면서 산골 간이역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스쳐 갈 듯하다. 선평역은 사람보다 바람이 머무는 곳이다.

지난여름 이후 정선선에도 몇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증산역이 민둥산역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별어곡역사는 억새전시관으로 새로 단장했으며, 나전역 앞마당도 모습이 달라졌다. 이제 별어곡역사에서 오래된 나무색을 닮은 낡은 기와지붕은 볼 수 없지만, 역명판과 우체통까지 예전 모습에 가깝게 살려놓았다. 역사를 전시관으로 활용하면서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산골 도깨비 마을과 함께하던 나전역 은행나무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정선선 꼬마열차.

정선선 꼬마열차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비둘기호 열차로 2000년 11월 14일 고별운행을 하면서 흘러간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 이후 통일호 열차로 얼마 동안 다닌 적이 있는데, 그나마 남은 수수한 멋조차 비싼 돈 들여 관광열차로 다시 고치는 바람에 아낌없이 지워졌다. 정선 아리랑 유람열차가 예전 별명 그대로 꼬마열차로 정선 철길을 달렸지만, 옛 정취가 사라지면서 그 인기도 시들해졌다. 작년 2008년부터 무궁화호로 열차 등급을 올리고 운행 구간을 태백선 제천역까지 연장하여 하루 왕복 2회 운행하면서 카페 열차로 꾸몄던 정선 아리랑 유람열차도 이제는 없어졌다.

기관차 덩치에 맞지 않게 객차 한두 칸만 끌고 다니는 꼬마열차는 정선선에서만 볼 수 있다. 다른 노선처럼 지하철 비슷하게 생긴 통근형 디젤동차로 운행하면 종착역에서 앞뒤 바꿀 필요가 없어 편하겠지만, 험준한 산악철도이기에 안전이나 성능 문제로 발전제동이 가능한 디젤 전기 기관차만 다닐 수 있다. 사람 모이는 장날처럼 임시 편성이 아니라면, 비둘기호 꼬마열차는 기관차에 객차 1량만 끌고 다녔고, 이를 이어 달렸던 통일호 꼬마열차나 정선 아리랑 유람열차는 발전차도 붙이면서 조금 길어졌으며, 지금 다니는 무궁화호 꼬마열차는 기관차, 발전차, 객차 2량으로 운행한다.

필름으로는, 아쉽게도 최종 편집에서 빠졌지만, 허진호 감독 영화 「봄날은 간다」 DVD 부가 영상을 열어보면 삭제된 장면 가운데 통일호 꼬마열차가 땡땡땡 소리 나는 기차 건널목을 지나 굽이를 돌면서 강을 건너는 영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김대승 감독 영화 「가을로」에 정선 아리랑 유람열차가 산으로 강으로 굽이굽이 기적 소리 내며 달리는 모습이 나오면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준다.

지난 2009년 7월 열차운행 개편으로 제천 - 아우라지 간 무궁화호 꼬마열차가 1일 4회에서 1일 2회로 줄었고, 임시 관광열차였던 서울 - 아우라지 간 무궁화호 열차가 정기 노선으로 1일 2회 신설운행하게 되었다. 결국, 오전에 왕복 1회만 운행하는 셈이지만, 정선선 꼬마열차는 모습을 바꾸면서 계속 이어진다.












시들어가는 간이역.

기찻길 곁에 플랫폼이 있고 조그만 역사가 있다고 간이역이 아니다. 반가웠던 시간, 외로웠던 시간, 기뻤을 때, 슬펐을 때, 그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있고, 세월이 있어야 한다. 아득하고 아늑한 시간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 시간 속에 묻혀버린 인연과 추억을 간이역은 기억한다. 오래된 기차역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고, 세월이 촉촉이 젖어 있어 소중하다. 이제는 그런 역이 지워지고 시들어가고 있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일까. 살다 보면 소중한 것을 잊고 지내는 듯하다. 지워지고 사라지는 소소한 기억들, 그런 것이 있기에 지금 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정선 선평역에서


기다릴 이도 없는데, 누군가 서성이는 듯.
맞아줄 이도 없는데, 누군가 손짓하는 듯.
그곳에 가면 누군가 있을 듯싶었다.

누군가 기다린다면, 지난날의 내가 있겠지.

무언가 남기고 왔던 것일까.
무언가 잃어버렸던 것일까.
그곳에 가면 무언가 있을 듯싶었다.

무언가 두고 왔다면, 지난날의 내 맘 있겠지. 




사진 - 2009.10, 글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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