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가는 마지막 겨울 기차.

창문에 김이 가득 서린 계절, 춘천 가는 기차를 다시 타고 겨울 속으로 떠난다. 철길에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 소복소복 빛을 낸다. 오래된 기차역, 오래된 철길은 측백나무 숲이 함께 이어져 아름답다. 이따금 철도 건널목을 지나면서 흐르는 땡땡땡 소리조차 정겹다.

청량리역을 떠나 성북역, 화랑대역, 퇴계원역, 사릉역, 금곡역을 차례로 지난다. 이윽고 평내호평역을 벗어나면서 다른 세상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려는 듯 긴긴 터널을 한참이나 달린다. 현대식이라는 이름으로 싸늘한 터널과 방음벽이 계속 이어지면서, 앞으로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광역전철은 지하철처럼 다닐 모양이다. 좁은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 사뿐 밟아야 하는 낡은 플랫폼도, 마주치는 열차를 피해 뜬금없이 역에 머무는 모습도 머지않아 사라질 그림이다.

경춘선은 10년에 걸친 복선 전철화 공사로 이미 새 철길과 새 역사로 옮긴 곳이 많다. 플랫폼 선상 역사로 사람을 맞던 조그만 간이역, 평내역이 맨 처음 철거되고 유리궁전 평내호평역이 생뚱맞게 생겼다. 마석역, 대성리역, 청평역, 상천역, 가평역 등도 새 역사로 벌써 옮겼거나 머지않아 그럴 예정이다. 추억 속 모습은 이미 잃었고 삭막한 공사장 풍경으로 이어진다.

기차는 가평역을 지나면서 북한강 따라 이어진 낡은 철길을 달린다. 강원도 춘천 경강역, 백양리역, 강촌역, 김유정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은 새 길과 옛 길이 서로 떨어져 있고, 아직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철도를 달려볼 수 있다. 낡은 기관차가 내뿜는 수증기 가득한 연기조차 흩날리는 눈발로 여겨질 만큼 밤사이 내린 눈은 모든 것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흘러간 시간을 간직한 기차는 눈길을 달린다. 춘천 가는 마지막 겨울 기차이다.




이제 하나 남은 플랫폼 선상 간이역.

흐르는 강물 한가운데 조그마한 섬이 떠 있듯, 철길 사이 플랫폼 위에 작은 역사를 지은 기차역으로, 경춘선에는 백양리역 외에 평내역, 상천역도 있었다. 그밖에 영동선 승부역과 마차리역, 중앙선 팔당역, 대구선 청천역, 동해남부선 거제역 등도 예전에는 그랬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옛 팔당역사가 빈 껍데기로 남았고, 다른 역도 낡은 역사를 철거하고 새 역사로 옮겨가면서 오래된 풍경이 아낌없이 지워졌다.

플랫폼 선상 간이역은, 부산 거제역마저 무관심 속에 넌지시 허물어지면서, 사실상 춘천 백양리역 하나 남았다. 이마저도 간이역으로 손님을 맞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골역 사진여행을 매듭지을 겨울 간이역으로, 춘천 백양리역으로 다시 가야만 했었다고 할까.

경춘선은 1939년 개통했지만, 전쟁 포화 이후 1950년대 후반에 새로 다시 지은 역이 대부분이다. 복선 전철화 공사가 진행 중인 2009년 12월 현재, 1950년대 건축으로 화랑대역, 사릉역, 금곡역, 경강역 정도만 남았고, 경춘선 개통 초기 1930년대 건축으로 백양리역과 김유정역이 있다.

화랑대역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받은 역사를 그 자리에 보존한다. 사릉역과 금곡역은 다른 경춘선 역이 그랬던 것처럼 철거 후 새 역사로 옮겨갈 계획이다. 북한강과 함께하는 경강역 - 백양리역 - 강촌역 - 김유정역 구간은 낡은 단선 철길 그대로 관광철도로 남길 예정이지만, 역사 보존 여부는 불투명하다.






사람 손길이 닿아야 한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역 역사 보존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건축은 단순히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숨결이 느껴지는 곳을 만드는 것이라 하면, 역사 보존도 찾아오는 이 발걸음 머물면서 사람 목소리 들리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유형 문화재는 인간 의식이 함께하지 않으면 참다운 보존이라 할 수 없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는 메마른 곳은 너무 거칠고 쓸쓸하다.

빈 껍데기만 남은 건물을 그대로 두면 폐허일 뿐이며, 이를테면 박물관, 미술관, 전시관 등으로 바꾸어 계속 활용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해 보인다. 중앙선 철도 역사를 담은 미술관이 된 원주 반곡역사가 그 예이다. 중앙선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반곡역이 폐역이 되어도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텅 빈 건물만 겨우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차역 미술관으로 남아 원주 문화인으로부터 계속 사랑받는 곳이 된다. 최명희 소설 「혼불」 배경으로 나오는 남원 서도역도 옛 서도역사와 선로가 놓인 부지도 함께 남원시에서 사들여 시골역 촬영장으로 고스란히 살려놓았다. 기차역이란 곳이 역사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니라 철길과 플랫폼이 더 중요하며 서로 어울려 함께 있어야 하는 걸 새삼스레 말해준다. 폐역은 아니지만, 기차 타는 사람이 적은 허름한 무인역에서 벗어나 민둥산 억새전시관으로 새로 단장한 정선 별어곡역사도 좋은 보기이다.






내 마음속에 그리던 간이역.

한 해가 그렇게 저물어간다. 책 한 권과 카메라로 채비하고 떠난 길, 내 마음속에 그리던 간이역을 찾아 떠난 여행을 마칠 때가 되었다. 거듭 이어지는 길이어도,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가고 싶었고 가야만 했던 길이 있어 가슴이 뿌듯했고, 스스로 지도를 만드는 여행이었기에 내가 거기에 있었다.

사진은 멀리 있지 않다. 사진은 내 마음에서 시작한다. 여행은 멀리 있지 않다. 여행은 내 마음에서 출발한다. 열차 창문 밖 풍경이었던 시골역을 찾아 사진여행을 떠나며, 겨울을 다시 맞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나 보다. 현실에서 풍경으로 떠나는 일탈을 다시 꿈꾸어 본다.


사진 - 2009.12, 글 -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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